디자이너로 10년, 요즘의 고민.

Seongeun Erica Kim
6 min readJan 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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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에 정식으로 일을 시작해서 꼬박 10년이 지났다. 지나고 보니 정말 짧았던 시간, 이제서야 어떤 것은 운이 좋아 두세 번, 어떤 것은 한 번씩 건드려본 것 같다. 처음에는 한 5년 정도 일을 배우고 대구에 내려가 작업실을 차리길 꿈꿨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생각과 환경은 참 많이도 변했다. 늘 생계형 디자이너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나 먹고살아야 해서, 더 나아 보이는 이런저런 환경에 스스로를 던져 넣다보니 자연스럽게 변화가 온 거 같다. 그 중 7년 정도는 IT업계에서 일하다가 얻은 변화들이 많고. 요즘의 나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글로 써보면 정리가 좀 될 것 같다.

Iteration, 완성이 없는 세상.

이 얘기에 앞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어떤 시대의 Phase에 비교적 앞 부분에 있는 사람이어서 인 것 같은데, 지금 일하고 있는 곳으로 옮겨오고 나서 보고 배운 것을 해볼 기회가 주어졌다. 흔치않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기회를 주고 믿어준 동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재작년 중반부터 작년까지 프로덕트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또렷하게 각인된 키워드는 ‘Iteration’이다. 무슨 그런 뻔한 배움인가, 만약 내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출발했더라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개념이었겠지만, 이 개념 때문에 여태까지 좋은 디자인이라 여겨왔던 기준이 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여태까지 디자인은 완성이 있는 세상에서 평가되었다. 물론, 개선을 멈추지 않았지만 개선이 실시간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기에, 긴 시간 동안 멈춰있는 완성이 있었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은, ‘완성도’나 ‘완벽한 마감’, ‘표현력’, ‘미감’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 분야는 다르다. 거의 완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기존의 디자인 컨벤션을 기조로 바뀌더라도, 적어도 0.1%씩 365일 계속 바뀌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이것을 개선이라고 부른다. 이 개선이 기존의 디자인 평가 기준으로 이뤄진다면, 별다르게 생각할 게 없었을거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더 많이 쓰느냐, 더 많이 사느냐, 결국 돈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개선이 되고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좋음으로 자리 잡는다. OS나 유틸리티성 프로덕트는 여전히 완성에 관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매출이 일각을 다투는 커머스나 유사 성격의 플랫폼, 경쟁이 치열한 시장의 제품에서는 갱신이 아닌 완결을 추구하는 것은, 디자이너인 내가 봐도 이제는 너무 나태해 보인다.

Iteration의 세상 속에서 디자인 시스템에 대한 생각도 좀 달라졌다. ‘디자인 시스템’하면, ‘브랜드 아이덴티티 시스템’이 대표적 벤치마크 대상이 됐다. 여태 쏟아져 나온 대다수의 디자인 시스템들을 보면, 고전적인 시스템과 유사하게 ‘일관성’이란 문제의식 아래 정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관성을 통한 유려한 사용 경험을 얘기하는데, 골몰하다 보니 이 일관성을 만드는 시스템은 결국 완벽한 마감을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일부 ‘효율성’도 거론된다. 반복된 디자인 또는 개발을 할 때, 미리 정의된 것을 가져다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시스템이 고도화된다고 가정할 때, 시스템의 완성 이상 뭐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짙어졌다. 더군다나 레고로 만든 로켓이 Space X 로켓이 될 수 없다. 시스템이 진화라는 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깊어졌다. 지금까지의 디자인 시스템과 똑같은 접근이라면, 길게 봤을 때 특정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만 같았다. 팀에서 필요한 ‘갱신’에 대한 효율성을 만들지 못하고, ‘갱신’을 제한하는 걸림돌이 되고 마는 듯했다.

그저 다르기만 한 스타일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도, 또 팀 측면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에 접근하는 방법을 달리해보려 했다. ‘영원한’ 일관성이 아닌, 갱신의 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최신’의 일관성으로. 전체 팀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흩어진 최신의 성공 사례를 공용 자산으로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주고, 필요 없는 것은 알아서 청소해 주는 프로덕트와 함께 이터레이션 하는 시스템. 다양한 팀이 체화할 수 있게 구현하기 위해선, 제작과 적용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 외 운영 측면에서도 고려할 게 생각보다 굉장히 많았다. 이 일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UX, BX 혹은 프로덕트 디자인과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큰 줄기.

어떻게 보면 꼭 직군에 해당하는 고민이기보단, 앞선 생각에 연장하는 고민이다. 그 어떤 구분도 모호한 세상이라 현대 미술은 모르겠고, 여하튼 미술은 어떤 사조에 의해서 평가받는다. 디자인은 역사가 짧아서 일까, 신 사조들이 후대에 가서야 대우받기 때문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한 가지 기준으로 좋고 나쁨이 가려지는 것 같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어떤 영역이 정의되는 기간도 줄어들었다고 치면, 이제는 기준이 다양해질 때가 온 듯 보인다. 애플 하드웨어와 OS의 디자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마존 프로덕트 디자인을 뭐라 치부할 수 없고, 비교적 완성의 세계에 있는 브랜드 디자인의 시각으로, 갱신의 세계의 프로덕트 디자인을 평가하기도 그리고 그 반대도 어려울 것 같다. 특정 사조라는 것이 정의될 때, 유사한 결과물들이 어떤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듯, 디자인도 그것을 둘러싼 맥락이 중요하고 그 아래에서 깊은 논의가 진행되면 건설적일 것이다. 데이터 드리븐, 비즈니스 드리븐이 최고랄 것도 아니고, 바우하우스가 최고라 할 일도 아니다. 전반적인 맥락을 포함한 기초 지식 아래 각자의 전문성을 고도화해 간다면 디자인 커뮤니티 전체가 한층 아니, 말도 못 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여기에는 시각디자인 교육도 연관된다. 바우하우스가 결국 한 명의 완벽한 건축가를 탄생시키는, 지금 말로 풀스택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었기에 한 획을 그었다면, 이제 슬슬 다른 획이 그어질 타이밍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생각이 깊어진 이유 첫 번째는, 끝도 없는 브랜드 & 프로덕트 디자이너 면접과 브랜드 디자이너 온보딩, 프로덕트 디자인 리뷰를 통해서. 두 번째는 아마존 같은 디자인 원리는 추구하는 회사에서 여러 가지 맥락 아래의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세 번째는 그간 거쳐온 다양한 회사들 간의 비교 체험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내 커리어 패스가 나름의 풀스택 교육이었다. 이 긴 시간을 거치기 전에 처음부터 내가 받은 교육과 실무 환경이 달랐고, 2011년 당시 주요 산업이 좀 명확했더라면 이 생계형 여정(!)과 고민의 시간이 좀 압축될 수 있었을지.

리더와 팀.

이건 10년의 말미에 처음 겪는 고민이었다. 막상 직접 리더를 해보니 신경 쓸 영역이 너무 넓었다. 내 능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고, 모든 걸 컨트롤하려 들면 안 되지만, 결국 컨트롤해야 하는 순간은 꼭 맞이했다. 책임감이 ‘엄청’나게 컸고, 아직은 어떨 때 치고 빠져야 할지, 팀원과 내가 동시에 행복한 게 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정리해보니 앞선 고민들을 다 제치고, 지난 2년간 모든 고민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관계에 서툰 내가, 모든 회사 생활 내내 나와 떨어지지 않는 다수의 관계를 계속 드리블하면서, 개인 업무까지 병행하는 것은 정말 극한의 난이도였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참 아무것도 모르고 겁도 없이 시작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 회사 맞는 좋은 팀을 만들 수 있을까? 올해는 손쓸 사이도 없이 시간이 스쳐 지나가 버렸는데, 푸념에 가까운 이 고민에 내년엔 한 가닥 희망이 보였으면. 큰 결과를 얻기 위해선 결국 팀이라는 것을 알기에, 또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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